감각은 언제나 의미를 밀어내야만 살아남는 것일까? 그들에게 왜 감각이 더 중요한지 궁금했다. 이 궁금증은 곧 이해하고 싶은 마음, 동시에 내가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 개념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다. 왜 이런 관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것이 내 어깨를 해방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작업에서 비유와 은유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그 속에서 관객들이 숨겨진 의미를 찾길 기대한 것 같다. 어쩌면 의미로부터 조금 멀어지는 일이, 나를 내가 모르는 나에게 더 가까이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난해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어렵고, 자신이 생각하던 미술이나 춤과는 너무 다르기에 더욱 접근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듯하다. 돌이켜보니 내가 추구하던 것도 어쩌면 감각과 감각의 만남이었을지 모른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 혹은 언어화되지 않는 감각은 여전히 낯설다. 그 낯섦이 때론 난해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나 역시 구체적인 도상을 통해 명확하게 표현하고 싶어 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그림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난해함과 익숙함 그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감각이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난해할 수 있을까? 그건 오히려 가장 쉬운 방식 아닐까? 어쩌면 진짜 난해한 건 감각이 아니라, 의미와 해석을 요구하는 방식들—비유와 은유일지도 모른다. 내가 감각적 예술 앞에서 느꼈던 '난해함'은 그 감각을 다시 의미로 되돌리려는 나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의미에서 멀어지고 싶다고 말하면서, 나는 여전히 의미의 언어로 예술을 이해하고자 했던 건 아닐지 생각이 든다.
난해함은 단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미 체계’ 가 만나는 지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을 보면서 어렵다고 느끼는 감각도 다른 해석의 언어, 인식의 틀, 혹은 경험의 범주가 어긋나 있을 때 발생한다. 예술 작품은 바로 그 어긋남을 드러내고, 거기서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의 세계를 꺼내 보이되, 그 의미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겨 두는 것. 그게 안무가가 말하는 감각과 감각이 만나는 지점이 아닐지 생각한다. 입이 없는 회화는 의미를 말해주지 않는다. 관객의 감각이, 그의 기억이 세계를 스스로 번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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