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가들의 글쓰기를 응원하며 2025년에는 이자용 작가의 에세이 '기록이 없는 탐험가' 를 진행합니다.
2025 예술가 에세이ㅣ이자용
가벼운 혀, 무거운 말
"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소리로 말해 보려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 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이것은 인생에 한 번 있는 일이고 나는 지금 그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있다. 사건은 항상 이전을 갱신하며 재발한다. 숙주를 삼키며 점점 더 커지는 괴물은 거대한 그림자로 나타나 어둠을 만든다. 그늘을 지우고 다시 빛을 들이고 속도를 달래 가며 밀려오는 것들을 곁눈질한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한 장이요.”
극장으로 걸어가며 나는 외국어처럼 이 말을 연습했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한 장이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한 장이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한 장이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버터플라이.”
“스왈로테일 버터플라이.”
“스왈로우테일 스왈로테일....”
오후 늦게 일어나 침대에 누워 한 시간이 넘게 릴스를 보면서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화면을 보면서도 머릿속엔 계속 다른 생각뿐이다. 다른 생각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뭐랄까…. 그냥 알 수 없는, 아니 어쩌면 말하라고 하면 말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취한 말들은 목구멍을 넘지 못한다. 말하면 좋아질 거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들이 현실에 내 옆에 있다는 것이 꼴 보기 싫다. 해야 할 말을 뒤로하고 의미 없는 단어가 새겨진 비석들을 세우고, 혀로 핥아본다. 주문처럼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한 장이요.”라는 말이 가볍게 목구멍 밖으로 밀려 나온다. 의미를 모르고, 혀를 부드럽게 하는 이 단어들을 발음하는 일이 불안을 잠시 잠재운다. 이와 비슷한 일이 과거에도 있었다. 축축하게 가라앉은 몸을 끌고, 극장에 가서 “행복 한 장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밀어내고, 행복이 현실이 아니라 내 바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티켓으로 살 수 있는 감정이 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살 것인가?
나는 아직 그를 본 적이 없다.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다. 간병은 보이지 않는 그를 매일 쓰다듬는 일이다. 그와 만난 자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혼자 항해를 떠난 배를 기다리던 자로부터 기다림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어 본 적 없다. 부서진 조각을 찾아 귀신처럼 항구를 떠도는 사람들. 사라진다는 것. 장소를 잃는 것. 어는 곳에도 없는 배경이 없는 존재. 말이 말이 아니다. 말이 현실 그 자체다. 몸무게가 줄고, 꼭 맞던 옷이 헐렁해진다. 올라가지 않던 지퍼도 수월하다.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헐렁해진 옷 속의 몸은 남의 몸이 된 것 같다. 피부와 몸 사이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하늘 위에 다섯 개의 태양이 떠 있다. 소리 없이 녹던 얼음들이 굉음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얼음이 녹는 소리가 일상의 담장을 넘어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귓속을 파고든다. 빠르게 녹는 얼음, 예상과는 다른 속도를 만난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지만, 자꾸 미끄러진다. 파랗게 멍든 무릎 속의 깨진 뼈를 쓰다듬으며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라고 중얼거려본다. 피부 속에서 다시 나를 찌르는 뾰족한 뼛조각들. 나의 이글루가 투명해진다. 그 안의 내 소중한 나의 분신이 점점 작아진다. 우리의 시간이 어긋날 때 나도 함께 붕괴한다. 모호했던 경계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분리가 시작될 때 나의 불안은 또다시 시작된다. 빠르게 녹기 시작한 쌍둥이의 몸을 업고 다니는 시암.* 점점 투명해지는 분신을 둘러메고, 항구를 떠날 배를 찾는다. 이곳이 아닌, 우리의 속도가 같은 곳으로. 숨 쉬는 걸 멈추면 안 돼. 부탁할게.
두려움을 덮어줄 눈을 캔버스에 그리며 또 중얼거려본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녹지 않는 그림 속 눈과 얼음들 사이로 취한 말들이 떠다닌다.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무엇인가 붕괴해야만 한다. 과거가 사라진 자리에 알 수 없는 미래가 온다. 태어난 것에 대해 한참 생각했다. 내가 사람의 몸속에 있었고, 그 사람과 살이 이어져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누가 내 몸에 가위를 대는 것을 허락했나? 어쩌다 태어났을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말. 순환의 굴레를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회복의 시간을 준비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래도, 거대한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날은 나는 몰래 과거를 둘러업고 한 번 더 배를 타고 싶다. 사람들이 없다고 말하는 과거와 지금이 만나는 장소를 찾아주고 싶다.
*시암 - 태국을 뜻하는 영어 단어 "Siam"에서 유래. 19세기 초, 태국(당시에는 시암으로 불림)에서 몸이 붙은 채 태어난 쌍둥이 형제 "창과 앵"이 유명해지면서, 이후 몸이 붙은 채 태어나는 쌍둥이를 "샴 쌍둥이"라고 부르게 됨.
이자용 작가는 꾸준히 책을 읽고, 음악이나 무용 공연을 보며, 철학이나 글쓰기 수업을 듣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더 깊이 가보려는 탐험가의 자세로 일상을 꾸려갑니다. 다른 이의 기록에 의존하지 않으면 숲에서 조개를 캐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 여정이 궁금해 한 달에 한 번 쯤 소식을 듣기로 했습니다. 미술 작가 이자용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