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서울에서 생활하던 작가는 올해부터 울산 북구예술창작소 레지던시에 머물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울산에서 어떤 경험과 성장을 하게 될까요? 앞으로 매달 정원 작가가 울산에서 보내오는 소식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평소 어려워하던, 하지만 언젠가 잘 하고 싶은 글쓰기에 도전하는 정원 작가에게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정원 작가의 울산 체류기 :
2월 이야기
작업을 하면 때때로 막막해질 때가 있다. 스스로 지난 작업들을 다시 재연하는 것은 아닐까. 작업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너무 많았는데 한순간 증발이 되어버린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2022년 겨울 유독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나, 둘 레지던시 공고가 올라왔다. 지금 지내고 있는 울산의 레지던시도 그중 하나였다. 울산은 연고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곳이었지만 레지던시를 지나갔던 작가님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며 매력적인 작업들을 하고 가신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작가로서 그 지역에 담긴 것을 소재로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 말쯤 울산의 레지던시에서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메일을 받았다. 처음 가보는 울산은 일요일 오전 같았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여 레지던시 부근을 걸었다. 햇빛 아래 치즈처럼 들어진 고양이들, 동네 구석구석에 조용히 숨어있는 작은 텃밭들을 보니 긴장된 마음이 안정되었다. 차분하게 인터뷰를 하였고 약간의 공백과 함께 인터뷰가 끝났다.
먼 길을 왔으니 바다는 꼭 가봐 야지 하며 레지던시 건너편에서 버스를 탔다. 20분 남짓 버스를 타고 바다에 도착했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남아있었지만 햇빛이 바다를 비췄고 신발은 벗은 사람들이 얕은 바닷가를 걸으며 산책하고 있었다. 울산의 바다는 생각보다 더 푸르고 투명했다. 바닷가의 크고 작은 돌멩이에는 이끼와 해초들이 눌어붙어 무늬를 만들어 냈다.
레지던시에서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 여러가지 고민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막상 작업과 전시를 잘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있는 수많은 작업과 도구, 재료들 그리고 짐들을 옮길 수 있을까 고민과 문제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결정해야 하는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고민을 하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 투명하고 맑은 바닷가를 한적하게 걷는 사람들과 그 뒤로 커다란 크레인들이 움직이며 공장이 돌아가는 오묘한 울산의 모습이었다. 바다와 인간이 뒤섞여 살아가는 이 공간을 작업으로 풀어내고 싶었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2월 초에 레지던시에 입주했다. 한동안 몸은 이곳에 있지만 정신은 아직 도착하지 못하고 헤매는 듯했다. 시간이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같이 허공을 맴도는 것 같았다. 이곳에 발붙이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고 울산을 알아보기로 했다.
정원 작가의 울산 체류기 :
3월 이야기
3월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한 일은 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작업실 복도 창문에서 보이는 항구를 관찰한다. 파란색 몸체에 ‘EUKOR’이라고 쓰여 있는 배가 가장 많이 보였다. 그 배가 없으면 초록색, 보라색 혹은 붉은색 배가 있었고 항구는 거의 비어 있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건물만 한 배들이 수없이 오고 갔고 이따금 공기를 울리는 낮고 묵직한 경직 소리도 들리곤 했다. 작업실에서 보이는 여의도의 2.5배의 크기라는 현대자동차 공장은 불이 꺼지지 않고 항상 움직였다. 공장은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 매일 보지만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작업실 뒤에 있는 염포산에 올라가면 망원경이 하나 있다. 그것으로 커다란 배 위에서 움직이는 쌀알만한 크기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사람으로 움직이는 곳이구나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한참 궁금해하던 차에 작년 레지던시에 있던 작가님 덕분에 울산의 여러 장소들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중 첫 번째가 현대자동차 공장이었다. 사진도 영상도 녹음도 안된다는 공장 내부에 들어갔다. 공장 내부는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뽑기 기계로 인형이 옮겨지듯 자동차들이 수많은 레일 위를 올라갔다 내려왔고 코스에 따라 차들이 점차 완성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도 그 레일 위에서 자동차와 함께 움직이며 작업을 했다. 레일 위에는 각 레일 당 할당된 초를 보여주는 시계가 있었다. 주어진 초 내에 해당된 작업을 끝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63.2초, 내가 기억하는 한 레일의 시간이다.
다음으로는 새울 원자력 본부를 방문했다. 고리원자력발전소로도 불리는 이곳은 한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다. 현재 2개의 원자로가 지어지고 있으며 이것이 완성되면 세계 최대 규모, 최대 밀집도를 가진 원자력 발전소가 된다.
마지막으로는 원자력 발전소 인근에 위치한 나사리 마을을 찾아갔다. 나사리 마을은 어업 중심의 지역이었으나 산업화와 원전으로 인해 그 규모가 축소된 곳이다. 실제 비어 있는 건물들이 많았고 오래전에 사용되고 버려진 창고에는 부표와 어망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 외에도 마을 곳곳에 어업도구들이 쌓여 있었고 이를 보고 어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닷가에는 모래에 뒤덮인 어업 기물들이 남아 있었고 방파제 너머로 원전이 보였다.
울산의 바다는 투명하다. 자갈로 된 해변을 거닐 때면 계곡에 온 것처럼 투명하게 수면 아래가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지역은 창틀에 청록색 먼지가 쌓이기도 하고 작업실 앞을 걷다 보면 종종 원인 모를 냄새들이 공장 쪽에서 흘러 오기도 한다. 모든 부분에는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 높은 곳이 있다는 것은 낮은 곳이 있기 때문이고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것은 밝은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때로는 모순적인, 양면적인 부분들은 또 어디에 존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