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좋아하고 생을 사랑하는 것이 쿨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내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에 익숙해질수록 살아있는 이 시간이 더욱 간절해진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삶이 시한부나 마찬가지다.
얼마 전부터 작업실에 가기 전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1시간 30분 정도 책을 읽는 새로운 루틴을 만들었다. 작업실이 위치한 연희동에는 맛있는 필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개인 카페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원한다면 매번 다른 향 다른 맛이 나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책을 읽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집으로 올 때, 그 시간이 늦으면 늦을수록 행복하다. 늦은 밤까지, 가끔은 다음 날 새벽까지 정해진 시간 없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는 게 내 직업이라니. 그리고 며칠 전에는 카페와 작업실 일정 뒤에 소극장에서 피아노 공연까지 보고 하루를 마무리하려니 이 삶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간절함을 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게 없는 것, 혹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 그런 것을 원한다. 카페에 가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것 그리고 가끔 공연장을 찾는 것. 내가 늘 해오던 일이었다. 그런데 새삼 왜 삶이 더 간절해지고 당연한 듯 누려오던 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지는지가 지금 나를 설명해 준다. 내 삶에 드리워진 슬픔 덕분에 나는 오늘 하루의 작은 빛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일상이 슬픔 없는 일상보다 낫다고 감히 말해본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잔인한 것도 추억이고.
나는 그런 사람이다. 항상 스스로를 잘 위로하며 살아왔다. 나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에 대해서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내 생각을 한다. 이게 나의 약점이다.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에 계속해서 나를 떠나고자 한다. 나의 한계가 나라는 것을 알고 극복하려 하기보다 그냥 한번 너의 땅으로 떠나보는 것이다. 겹칠 수 없는 섬에서 얕은 물을 지나 안전하게 너의 섬에 공기가 되어 도착한다. 다음번엔 지금보다 더 멀리 갈 수 있게 탄성이 떨어진, 늘어난 고무줄같이 것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수집해 온 타인의 조각들로 나의 섬을 장식하고 이전과는 조금 다른 내가 된다. 나를 찾아온 그들이 자신의 조각을 만나 쉽게 발 디딜 수 있도록. 수없이 타인이 돼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 여행조차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지 너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나와 너의 구분은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네가 가진 것이 나한테도 있고, 나에게 있는 것이 너에게도 있다. 그러니 ‘너는 왜 그래?’라는 말은 내가 아직 내가 가진 너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하는 것. 나는 이게 불가능하다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렸다. 그게 결국 나를 알아가기 위한 여행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네 생각대로 너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그 사람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것. 내 생각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 나의 해석 같은 것도 필요 없다는 것. 어느 부분에서는 생각이 깊을 필요가 없다는 것.
잠들기 전, 헤매다 쓰러진 너를 돌아눕게 하여 내 목으로 끌어당긴다. 너는 부러 눈을 깜박이며 긴 속눈썹으로 내 목을 간지럽힌다. 우리는 이렇게 가깝다. 어디 한 곳 연결되지 않았지만, 속눈썹이 닿는 거리에 누워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오래 끊어진 너를 안을 수 있을까? 어쩌면 생명을 가지고 있는 지금이 찰나의 순간일 수도 있다. 영원의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곱씹을 기억을 만들 시간을 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주 죽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말했다. 너의 죽음은 확실하니 조바심 낼 필요 없다고. 내일 죽을 수도 돌아눕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고. 네 심장은 너무나 연약해서 언제나 멈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너를 알아간다.
네 생각대로 너를 말한다.
너는 나의 반사. 되돌아온 빛.
나는 너의 되돌아온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