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조용하다. 비 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위치나 속도에 따라 소리가 달라 소리의 겹이 느껴진다. 불규칙한 빗소리를 들으며 사물의 표면과 물질을 상상한다. 이 박자와 소리의 겹을 하나하나 펼쳐 악기를 정해주고, 오선지의 마디 안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이 음악가에게 있겠지. 천둥소리는 팀파니, 플라스틱 지붕은 바순, 시멘트 담 위로 떨어지는 소리는 비올라, 위에 있는 잎사귀에서 아래 잎사귀로 떨어지는 축축한 높은 음은 피콜로, 옥상에서 수관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호른, 모든 소리를 하나로 모아주는 듯한 빠르게 내리는 빗소리는 바이올린의 몰아치는 연주 같다. 무엇과 부딪히는가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생각하며, 나는 세상과 몸이 만나는 방식을 떠올렸다.
장애가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한 달에 2주,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오른쪽 마비와 실어증을 겪고 계신 엄마를 돌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조금 달라졌다. 나는 엄마와 함께 세상의 반대편에 서게 됐다. 우리가 어딘가를 가고 싶을 때 현관 문턱 하나가 높은 장벽이 되고,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보도블록의 낮은 턱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골프선수처럼 예민하게 바닥의 경사를 살핀다. 현관을 나서면 우리는 둘이 한 몸이 되어 계단을 내려간다. 무거운 휠체어를 차에 싣고 이동하지만, 도착한 곳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런 불확실함 끝에, 차라리 집에 남게 된다. “가볍게 산책이나 할까?” 같은 생각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코로나 시기, 일주일간 집에 머물며 나는 외출이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 본 적이 있다. 자발적으로 일주일 내내 집 안에 머문 적은 있지만, 나갈 수 없어 갇히는 것은 전혀 달랐다. 지금 나는 엄마 뒤에서 세상이 우리를 거부한다는 감각을 매일 느낀다. 밖에 나올수록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얼마나 ‘비장애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는지 더 선명하게 보인다. 같은 공간에 머문다 해도 삶의 경험이 너무나 다르다. 입장이 가능한 곳, 입장이 불가능한 곳.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내가 달라지듯, 어떤 환경을 마주하느냐에 따라 장애 여부가 정해진다. 어쩌면 ‘장애인’이라는 말보다 ‘장애 환경’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방문한 장소에서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이 충분하지 않고, 왜 모두가 이용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 돈이다. 다수를 만족시키고 소수의 불편을 모른척하는 방식으로 많은 것이 생겨난다. 많은 사람이 살기 편하도록 표준화된 도시에서, 소수를 위한 자리를 요구하는 싸움은 비장애인의 공감을 얻지 못한 채 거의 늘 패배한다. 그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내가 여전히 그곳에 몸을 두고 싶은 이유는 장례식에 가는 일과 비슷하다. 그곳에 함께 있음으로, 위로할 수 없는 일을 위로하는 것.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장애 환경에서 느낀 소외감을 나의 문제로 삼고 싶다. 이동 중 마주한 경사로가 없는 곳의 몇 개의 계단만으로 세상의 벽을 체감할 때 내가 누려온 혜택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까지가 나의 몸이라면, 경계를 지우고 가까이 머물며 감정이입을 통해 타인의 고통과 연결될 수 있다.
비에는 표준이 없다. 자유롭게 세상과 만나 그들 각자의 소리를 낸다. 그렇게 여러 겹의 소리를 만들어 내며 어우러진다. 정상성은 늘 인간에게만 요구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는데, 그 사실을 왜 지우려 하는 걸까. 정상과 표준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장애는 단지 시기의 차이일 뿐, 대부분의 사람이 죽기 전에 한번은 겪게 될 어떤 것이다. 엄마가 아니었더라면, 나 역시 같은 인간이면서도 다른 몸으로 마주할 때 달라지는 환경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너도 알지 마음과 무지개는 동그랗다는 걸 사람들은 그 반쪽밖에 보지 못하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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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의 꿈’,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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